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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촌유래 | 역대이장 | 마을연혁 | 리명유래


    고려 18대왕 의왕7년(1153)에 탐라군(耽羅郡)을 탐라현(耽羅縣)으로 고쳤으며 최섭경을 탐라령으로 삼고 김녕(金寧)을 비롯해서 14개 현을 두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김녕리는 현구좌읍과 조천읍의 중심이었으며 설촌연대는 현청소재지가 되기 전일 것이 읍연혁에 기술했다. 

    김녕리 김호민옹(金豪敏翁)의 말씀에 의하면 남흘동(南屹洞) 남쪽 2km지점에 "삭시꼴이"라는 곳이 있는데 현재도 대나무가 있고 기왓장이 발견됐다는 것이며 속칭「왕개」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혈거토착(穴居土着) 지역임을 전하고 있다.

    이로서 김녕경(金寧境)의 역사는 2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조 18대왕 의종 7년(1153)에 김녕에 현촌을 설정하여 후망대 연대를 구축하였는데 이것은 입산봉(笠山峯)에 있었던 것을 말하며 서쪽으로 동복리(東福里) 한마당 봉화대 북촌리(北村里)와 함덕리(咸德里) 신촌리(新村里)와 삼양리(三陽里)경계의 동산에 있는 봉대에 연결되는 것이다. 

    김녕향사는 관덕정(觀德亭)을 본받아 건축하였는데 연대미상의 화재로 소진되어 장부 집기등 귀중한 유물이 모두 없어져서 복구를 못했기 때문에 김녕리 연혁을 엮으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찍이 평양(平壤)에 이르기까지 상인들의 출입이 있었고 이조시에는 진상용으로 수자(袖子),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치자(梔子) 옷 동백나무등을 식재 장려해서 한양으로 반출했다.

    설촌유래

    김녕리의 설촌은 2~3천년 전으로 추정한다. 

    속칭'왕궤'라는 곳이 혈거유적지라하고, 남흘동 남쪽 2km 지점에 있는 '삭싯골'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말에 양천 허씨가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특별히 언제부터 어떤 성씨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김녕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폐합 때 김녕리 동쪽 부분을 동김녕리, 서쪽을 서김녕리로 분리하여 주민간의 갈등을 야기시켜 왔으나 마을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주민여론이 형성되어 1999년 7월 11일 주민투표로 마을을 합치기로 하고, 2000년 1월 1일부터 동김녕리와 서김녕리를 통합하여 다시'김녕리'로 바꿈으로써 동 서김녕리가 하나로 통합되는 "하나의 김녕리"로 다시 태어나 구좌읍의 제일 큰 마을이 되었다.

    김녕리란 호칭은 「富하고 平安한 마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