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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두동(용머리등래)

    입산봉에서 內白虎群(내백호군)이 뻗쳐 내려온 마지막 끝으로 마치 용의 머리와 같이 되어 있어 동명칭을 이렇게 지어진 것이다.
    이 동은 해안선에 접하여 모든 해상 발전 開拓(개척)에 중요한 지대가 되었다. 예부터 이 지대에는 상류층이 거주하였으며 근세에는 이 부근에서 김녕리시장이 형성되어 한때 중요한 상업지역으로 발전하여 왔었다.
    그 이유는 해안선인 한계선창에 접하여 외래 선단이 다수왕래하면서 동발전이 급속도로 변화되었으며 리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김녕시장도 용두동으로 북쪽은 사동까지 뻗쳐 나갔다. 不得己 장소가 협소하여 시장은 동김녕리로 이사까지 하게 된 것이다.

    대충동(대청거리) 구,장터거리

    대충동은 신산동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옛적에는 김녕리의 생활권 중심지로써 이 지대에는 비석동으로부터 시작한 정기시장이 연결되면서 큰 시장으로 상인의 왕래가 많았다. 동 발전이 급속도로 성장하자 서기 1544년경에 제주목사 임형수가 와서 김녕에 정사를 건립하고 동학이라 칭하는 서당이 있었다.
    서기 1600년경에 풍헌제도가 되면서 이 정사는 풍헌사무실로 사용하다가 서기 1800년경에 관찰사의 청사로 사용. 서기 1850년경에 관찰사청을 행원으로 이사하였다.
    서기 1900년경에는 평대리에 면사무소를 신축하고 모든 구좌면의 행정사무를 전담하였다. 이 청사는 일본인들이 한일합방후에 일본인 순사 주재소로 사용하다가 타처로 주재소를 신축하여 감으로써 리 공회당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화재로 인하여 건물이 반소된 것을 수리 하였으나 고건물로써 유지하지 못해 철거하고 서김녕리 사무소를 건축하였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예부터 동내 이름인 대청거리를 대충동이란 지명으로 불렀다 한다. 당시의 대충동의 구, 장터 거리가 용두동으로 옮겨 와서 성시를 이루다가 동김녕의 동성동으로가서 김녕장이되었다 한다.

    한수동

    비석동의 서북쪽으로 용두동의 서쪽.
    한수해라는 해안선이 접하고 있어 예부터 많은 선박들이 풍랑을 피하기 위하여 입항하고 수일간을 정박하였다가 출항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지대 서쪽과 서북쪽에는 남흘동으로 뻗쳐온 부제동산이 있어 피선항구로써 많은 선단들이 정박하여 왔으며 이 한수동 해안선에는 용천수의 분출구가 많아 수가물, 고양물, 흐르물, 안저물 등의 식수구가 있어 많은 선박의 식수는 물론, 주민들의 음료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큰 한수해 작은 한수해 하면서 안전지대로써 이용하다가 1930년 일본인들이 와서 큰 한수해와 한계빌래 사이에 방파제를 쌓아 양어장으로 이용하였고 작은 한수해는 매입되어 주택지로 변화되었다. 차차 매입되면서 주택지와 해안용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때 이 한수해를 각종어족과 뱀장어 양식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이 해안선의 용천수는 주민의 식수는 물론이며, 선박의 식수로 많이 이용되다 공동수도가 가설되어 사용치 않고 있어 흔적만 남아있다.

    남흘동

    묘악산의 산맥이 민머르동산으로 새마실 남흘동 부제동산까지를 연결되고 남흘동에 용천수가 있어 설촌주민은 세마실동산의 동굴에서 생활하다 용천수을 따라 남흘동으로 이주하였 왔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본 리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남흘동인데, 옛적에는 부제동산에서 볼 때에는 남쪽으로 위치함으로 남흘동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봉지동

    신산동과 왕사동, 청수동, 용두동의 중간에 위치하고 일부 해안선을 접하고 있다. 이 봉지동은 옛적에 큰 못이 있어 원거리를 왕래하는 봉황새들이 이 연못에 와서 수일씩 휴식하다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곤 하여 마을 사람들이 이 연못 부근을 봉지동이라 이름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도 용천수가 있었는데 물맛이 좋아 음료수는 물론 이곳의 청수를 이용하여 양주공장을 설립. 제주특별자치도 전 지역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연못들도 매입되어 주택지가 되었다.

    청수동

    청수동은 동성동과 왕사동, 봉지동의 북쪽의 해안선에 접하고 맑은 물이 용출되어 청수동이라 이름한다. 청수동의 물은 극냉한 청수물로 하절기가 되면 하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 이, 삼일씩 留宿(유숙)하면서 물을 맞고 간 곳이다.

    신산동

    신산동은 입산봉에서부터 암석지대를 형성하여 동으로 동성동과 서쪽으로 대충동을 북쪽으로 용두동, 봉지동, 청수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신산동은 입산봉에서 대산동굴이 있어 일설에는 김녕리 설촌시대에 이 동굴에서 거주하면서 토지에서 농경생활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지역은 방화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그 부근에는 옛 기왓장이 있고 주춧돌 모양의 석좌도 있다 한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충동과 용두동, 비석동으로 해안지대로 이주하면서 해상 발전을 위하여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연안에서 어획활동을 하게 되면서 항해하는 외래 선박도 입항하게 돼 김녕리는 큰 발전을 한다. 현재 신산동에는 복지회관, 농업창고, 단위농업조합, 농업지도소가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와 예수 교장노회 및 전주교회당이 지역에 있다.

    동성동(성문골)

    동성동은 입산봉에서 북쪽으로 신산동에 접하여 동북쪽으로 동김녕 성문으로써 동성동에 연결되고 왕사동, 청수동으과 인접해 있다. 이 지경은 입산봉에서 석암지대로 풍수학적으로 백호군에 속한다. 지하에는 동굴로 형성되어 입산봉의 기생화산을 입인하고 있다. 신산동의 동굴과 동성동의 게웃세동굴은 많은 청수가 용출되며 예전에는 김녕리 행사시에 꼭 이 게웃세 동굴물을 사용하였으며 가정에서 제사시에도 이 물을 사용하였다 한다.제주 삼신인 고, 양, 부 삼성도 성산포 성역의 혼인지에서 각자 신여와 혼인하고 고씨는 현재 북군쪽으로, 양씨 부씨는 남군쪽으로 각자 생활지역을 마련키 위하여 행동하다 고을방은 우리 김녕 지경에 동굴물이 좋아서 잠시 왕사동에 주거를 정하여 살며 큰 사제까지 만들어 거주하다가 더 좋은 물을 찾아 제주읍 산지물 거처로 이주하게 되고 그래서 고, 양, 부 삼신이 거처로 이주하게 되면서 삼성 동굴에 거주하게 된 것으로 전설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당시에 우리 김녕리에 고을방 성주왕자로서 거주하였다하여 왕사동이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물 좋은 곳으로 사찰이 건립되었다가 화재를 당하여 사찰이 없어졌다. 지금도 동굴 근처에는 청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한다.

    쇠난동산

    송아지가 이 동산에서 낳았다는 설과 쇠(鐵)가 이 동산에서 생산되고 거기서 보섭가마 등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어서 쇠난동산이라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괴살매

    고양이가 누워있는 모양이라 해서 괴살매, 묘악(猫岳) 또는 화산악(花山岳)이라 한다. 김녕포는 고려조 이래로 육지와의 해상교통이 트였는데 (이하 제주의 인맥(강삼룡)에 의함) 광산김씨 17세 윤조공(胤祖公)은 그의 형 군기감 김흥조가 공민왕 17년 (1405)에 신돈(辛旽) 살해 모의에 의한 참와를 목격하고 멸문의 와를 벗어나 김녕포에 기착했다. 윤조공은 훈학에 힘쓰는 한편 예의와 효도를 숭상하여 그 덕이 높았고 만년에 한동「감남굴」을 개촌하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 제자들에 의해 화산악에 안장되다. 윤조공은 광산김씨 문간공파 중시조(中始祖)이다.

    입산봉

    산모양이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삿갓오름이라하고 한자로 고쳐 笠山峰이라 했다. 산정(山頂)의 화산구는 약 3만평의 평평한 분지를 이루어 전답으로 이용되며 비닐 하우스를 이용. 여러 가지 특용작물을 생산한다. 여기에 흐르는 샘물은 평대리 가름병디 전설에 얽힌 유서있는 곳이다.

    개웃샘물

    맑고 시원한 물이 굴속에서 바닷쪽으로 흘러내리는데 죽어가는 사람도 이 물을 마시면 살아난다는 용천수다. 여름에 수박을 이 물에 담그면 냉각되어 시원한 맛이 들고, 겨울에는 그 반대로 따뜻한 물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