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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사칠지 전설

    우리 김녕리에도 통일신라이후 제주도는 신라의 영토로 자동 편입되고 따라서 고도의 신라불교문화를 더욱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중국의 동남해안에 걸쳐 신라인과 일본인들이 크게 진출하면서 해상의 불의의 사정에 의하여 거유지로서 제주도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하겠다. 당시 해상의 왕자라고 부르던 장보고는 동안삼국을 무대로 무역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제주도의 북안(北岸)과 남안을 항해중에 해상조류와 돌발적인 폭풍우로 인하여 난항일 시는 북안에는 김녕리항구에 입항하고 남안에서 당하였을 시는 대정과 서귀포항에 입항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 시대는 신라불교문화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우리 제주도에서도 각처에 기복불교가 성행하였다.
    우리 김녕리에는 2개소의 옛절터가 있다 한다. 한 곳은 동김녕 왕사동(王寺洞)이며 또 한곳에는 신산동(新山洞)웃편에 부무슬(富茂瑟) 지경이다. 부락노인들의 전하는 설에 의하면 왕사동에는 김녕리 부락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할때부터 계우세물이 맑아서 그부근에 집중적으로 인가가 형성되면서 사찰을 건축하여 조석(朝夕)으로 불공을 하며 기도를 하였다 한다.
    지금도 지명은 왕사터라 왕사동내라 하여 古석축에서 옛기와장이 출토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부무슬 근처의 지경에는 옛적에 강씨 부자가 거주하였으며 부자가 절을 건축하여 사찰의 명칭은 홍법사(弘法寺)라고 전하여 왔다 한다. 이 절은 강씨 부자가 해적들에게 금품과 재산을 강취될 적에 해적들의 방화로 인하여 부자가(富者家)이며 홍범사이며 전부 연소가 되어 버렸다 한다. 수백년을 방치하여 두었다가 근세에 와서 경작지로 양계사육장으로 되었다.

    김복생남 신화설

    우리 사회에서는 옛적부터 문벌민족사회가 자식이나 권세를 누리게 되는 권력시대가 있어서 자식 없는 부모들은 자식을 낳기를 원하여 산신기도를 하기 위하여 해안지대나 산간자연동굴내에 한쌍의 석불 향하여 사월 보름날 전후하여 칠일간을 청수목욕하며 예물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기를 『자식하나 낳게 하여줍서』하면서 『만수사(萬壽寺)의 동자복신(東資福神) 해윤사(海輪寺) 서자복신(西資福神) 우녀천(牛女泉)의 산신할망』하면서 354번을 되풀이한다.
    그래서 부부가 동침하게 되면 자식을 얻는다 하여 우리 김녕리에도 동김녕에 성새계당(城塞界堂)이 있고 서김녕의 서문당에 있어 춘추절이 되면 신곡(新穀)을 마련하여 불공을 들리러 가는 사람이 많으며 석불앞에는 오색찬란한 명주천이 걸려 있다. 이래서 옛적에는 자식을 낳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공을 드렸다 한다. 지금도 생남(生男)을 얻기 위하여 불공하는 사람이 있다.

    김녕 귀넷깃당 전설

    소천국은 알손당 고부리물에서 솟아나고 백주또는 강남천자국의 백모래밭에서 솟아났다. 백주또는 인간으로 탄생하여 열다섯 십오세가 되어 가만히 천기를 짚어 떠보니 천생배필이 될 짝이 조선국 제주도 송당리에 탄생하여 사는 듯 했다. 백주또는 신랑감을 찾아 제주도로 들어와 송당리오 가서 소천국과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부인은 아들을 5형제 낳고 여섯째를 포태중에 있었다. 백주또는 많은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이 걱정이 되었다.
    「소천국님아 아기는 이렇게 많아 가는데 놀아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을 어떻게 길러 냅니까? 농사를 지으십시오.」
    부인의 말에 소천국은 오봉이 굴왓을 돌아 보았다. 피씨 아홉섬지기가 되는 밭이 있었다 소를 몰고 쟁기를 지워서 밭을 갈러 갔다. 백주또는 점심을 차리는데 국도 아홉동이 밥도 아홉동이 열 여덟동이를 차려서 밭에 지고 갔다.
    「점심일랑 소 길마나 덮어 두고 내려가오」 백주또는 집으로 돌아오고 소천국은 계속 밭을 갈고 있었다. 이때 태산절 중이 지나다가 배가 고프다면서 들렀다.
    「밭가는 선관님아 잡수던 점심이나 있거든 조금 주십시오」
    소천국은 먹은들 얼마나 먹으랴 하고
    「저 소 길마를 들고 보아라」
    이렇게 말하였다. (註 : 길마 = 질매(제주방언))
    중은 국 아홉동이 밥 아홉동이를 모조리 쓸어 먹고 도망가 버렸다.
    소천국은 배가 고파 점심을 먹고자 보니 밥은 한 술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밭갈던 소를 때려 죽여 손톱으로 가죽을 벗겼다. 찔레나무로 고기를 구우며 익었는가 한점, 설었는가 한 점 먹다 보니 소 한 마리가 다 되었다. 그래도 초요기도 되지 않았다. 다시 소가 없을까 하여 묵은 각단밭을 보니 검은 암소가 한 마리 풀을 뜯고 있었다. 소천국은 이 놈을 잡아 먹으니 그제야 다소 요기가 된 듯 했다.
    쇠머리도 두 개, 쇠가죽도 두 장을 담장에 걸쳐 두고 소천국은 배때기로 밭을 갈고 있으니 백주또가 점심 그릇을 가지로 왔다.
    「소천국님아 어찌해서 배때기로 밭을 갑니까?」
    「그런게 아니라 태산절 중이 지나다가 국 아홉동이 밥 아홉동이를 다 들러 먹고 도망가 버리니 할 수 없이 밭갈던 소를 잡아 먹고 남의 소까지 잡아먹으니 소도둑놈 말도둑놈이 아닙니까? 살림을 분산합시다.」
    백주또는 화를 내며 바람위로 올라서고 소천국은 바람아래로 내려서서 백주또는 당오름(웃송당 언덕배기)에 가 좌정하고 소천국은 알송당 고부니모르에 좌정했다.
    소천국이 배운 것은 본래 사냥질이었다. 백주또와 갈리자 좋은 활과 살을 둘러메고 노루, 사슴, 산돼지를 잡아 먹었다. 사냥을 다니다가 해낭곳 굴왓에서 정동골쳇 딸을 만나 첩으로 삼고 고기를 삶아 먹으며 세 살림을 꾸몄다.
    한편 백주또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세 살이 되자 제 애비나 찾아 주려고 아이를 업고 소천국을 찾았다. 행낭곳 굴왓 움막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니 소천국이 있었다.
    업은 아이를 부려 놓았다. 아이는 아버지를 만났으니 어리광을 부리노라고 아버지 무릎에 앉아 삼각수(三角須)를 뽑고 가슴팍을 치곤 했다. 아버지인 소천국은 화를 내었다.
    「이 자식 밴 때도 일이 글러서 살림이 분산되더니 나서도 이런 불효한 행동을 하니 죽여야 마땅할 것이로되 그럴 수는 없고 동해바다로 띄워 버려라」
    무쇠석갑에 세 살난 아들을 자물쇠로 잠그고 동해바다에 띄워 버렸다.
    무쇠석갑은 용왕국에 들어가 산호수 가지에 걸렸다. 그 날부터 이상하게도 용왕국엔 풍운 조화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용왕국 대왕이 이상히 생각하고 큰 딸을 불렀다.
    「큰 딸아기 나가 보라 어찌 든변 난변이 세어지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둘째 딸아기 나가 보라 어찌 든변 난변이 세어지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
    「작은 딸아기 나가 보라 어찌 든변 난변이 세어지느냐?」
    작은 딸이 나가 보더니
    「산호수 상가지에 무쇠 석갑이 걸렸습니다.」
    「큰 딸아기 내리워라」
    「한쪽 귀도 달싹 못하겠습니다.」
    「들째 딸아기 내리워라」
    「한쪽 귀도 달싹 못하겠습니다.」
    「작은 딸아기 내리워라」
    작은 딸은 번쩍 들어 내려 놓았다.
    「작은딸애기 문 열어라」
    작은 딸애기는 꽃당에 신은 발로 세 번을 돌아가며 둘러 차니 무쇠 석갑이 저절로 열렸다. 속에는 옥같은 도련님이 책을 한 권 받아 앉아 있었다.
    용왕국 대왕이 말을 걸었다.
    「어느 국(國)에 사느냐 ? 」
    「조선 남방국 탐라국에 삽니다.」
    「어찌하여 왔느냐 ?」
    「강남 천자국에 국난이 났다 하기로 세변을 막으로 가다가 풍파에 쫓겨 들렀습니다.」

    김녕리 도살장

    서기 1427년 세종9년에 법에 의하여 우마재교금지법이 제정되어 지방면단위로 1개소씩 도살장의 허가를 주었다 한다. 그래서 당시 백정 평민 잡처령(雜處令)으로 백정은 우마도살의 업을 하도록 하였다. 우리 김녕에도 이천용(李千用)이란 자가 와서 도살장업을 하며 정기시장일이면 1일 牛 5필가량이나 도살하였다 한다.
    평일시에는 1필가량은 도살한다고 한다.

    김녕리 돈제의 유래

    우리 김녕에는 동굴과 용천수가 해안선과 동굴내에서도 분출됨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안정하며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니 전입 주민이 증가되면서 해안지대로 발전하면서 천연적으로 지형은 방풍이 잘 되어 있는 큰 한수해(漢水海)와 작은 한수해가 있어 항해하는 선단은 폭풍이 불어올 염려가 있거나 일기불순하면 우리 김녕 항구에 입항하여 수일씩 정박하게 된다.
    그래서 육해상으로 사람 왕래가 많아지면서 부락주민의 생활이 풍요로와 지면서 김녕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주민들이 자신의 건강은 물론 가족의 질병 예방에는 주로 신을 위함을 생명처럼 주야로 모든 사물의 형체는 신으로 인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음식물을 차려서 제를 올리곤 하였다. 그래서 일년을 두고 사계절을 때때로 잡신을 위한 제사를 올리게 된다.
    우리 김녕리에 돈제(豚祭)의 유래도 오랜 역사속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로 예부터 김녕포구에는 큰 한수해와 작은 한수해가 있어 여하한 대풍이 불어도 선단의 피난처로서 안전한 정박이 되며 용천수가 충분하여 급수가 용이하므로 선단 출입항이 많았다 한다. 그래서 이 상선들은 정박하였다가 출항하게 되면 꼭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용왕신, 천신과 북두칠성에게 기원하게 된다. 이 때는 꼭 돈제를 올리게 된다. 그래서 무사히 항해를 하며 상선의 무역이 잘 되므로 꼭 상선들은 항구에서 출항을 할 때는 꼭 이런 돈제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면 상선들이 풍랑을 잘 피하고 장사가 잘 된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김녕주민도 이런 돈제를 신에 올리면 모든 일이 잘되며 가정이 평안하고 해상업이 잘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주민들까지 무당을 모시고 돈제를 일년에 한번씩 지내며 또는 집에 우환이 발생하면 꼭 돈제를 올려 무사히 완치를 빌게 된다. 이런 풍속이 김녕리에는 딴 지방과 달리 전하여 지고 있어 현세에도 이 풍속이 아직 정리가 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조상전과 신에 기도하는 것은 오직 가내와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좋은 행사라 하겠지만 시대에 따라서 잘 생각하여 볼 일이라 하겠다.

    김녕리 세비육

    거금 300여년전에 김녕리 모(某)씨댁에 상사가 났다. 지관을 모시고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다가 여기가 정혈(正穴)이니 장사할 만하다. 한참 있다가 지관이 말하기를 광을 팔적에 비록 돌이 나올지라도 파버리면 안된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게 됨에 있어서 광을 파는 사람은 이 말을 미리 듣지 못한지라 돌을 일러버렸는데 새 한 마리가 비육하면서 달아나 버린다. 아뿔사 새를 놓쳤다. 그런데 새 한 마리가 보이기가 무섭게 웃통을 벗고 얼른 덮는다는게 새의 한쪽 눈이 다치고 말았다.
    한 마리의 새는 놓쳤으나 한 마리는 잡아두고 장사를 지내고 나서야 지관의 말을 되풀이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 마리의 새는 가두어 두고 장사를 지낸 것만은 다행한 일이다.
    옛부터 산터에 새가 머물러 있으면 명산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댁은 그 후로 재산이 부풀대로 불고 자손도 많았으나 몇대에 한사람씩 눈이 까진 자손이 나왔다고 한다.

    두럭산

    산을 오름, 매, 봉(峰), 악(岳)이라 표현해 왔다. 예외로 한라산, 성산, 단산(簞山), 산방산, 두럭산 만은 산이라 했는데 이를 오대산이라고 했다. 산이라 할 이유가 제각기 갖고 있다. 한라산이 영산이어서 운이 트이면 장군이 난다고 하는데 두럭산에서는 장군이 탈 용마(龍馬)가 난다고 한다.
    두럭산은 김녕리 바닷가에 있는 조그만 바위동산인데 신성한 산으로 생각해서 그 가까이에서는 언동을 조심한다. 만일 큰소리를 지르면 바다에는 풍랑이 일어 곤경에 빠진다.
    옛날 설명주할망(설문대할망)이라는 키가 매우 큰 할머니가 있었는데 이 할머니는 한라산과 성산에 두 발을 놓고 앉아 이 두럭산에서 빨래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물허벅 시대

    한라산의 물줄기가 각 해변에 이루어 비로서 단물 줄기로 수원이 되어 제주도의 여자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물허벅을 지어보지 않은 여자는 없을 정도이다. 아침, 저녁 해변가에 불터에는 줄지어 서로 물허벅을 지고 기다리곤 한다.
    그러다가 근세에 와서 대부분의 마을에 수도시설이 되고 지금은 물허벅 지은 여자가 보기 드물 지경이다. 그리고 옛적에는 물허벅으로 비단 물만 나는 것이 아니라 동네서나 집에서 경사가 있을때는 악기 대용으로 물허벅장단의 노래가 구수한 음정으로 부인과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이며 밤새도록 놀기도 한다.
    이와같이 우리 고장에 옛 풍경은 구수하며 정겨웠던 시절이 지금도 아쉬워하면서 고향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한다. 물허벅 장단의 덩 - 덩 소리는 들어본 사람만이 정답고 구수한 음정이 생각날 것이라 본다.

    백중제

    (음력 7월 14일 밤)
    옛날부터 이날이 오면 목축업을 하는 사람, 대풍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명절과 같이 이날은 산야에 가서 백중제를 지내며 목축 농사에 대한 풍성할 것을 기원하는 날이다.
    또한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은 피부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밤에 목욕을 하였다 한다. 이 백중이란 사람의 이름인데 하루는 바닷가에서 우마의 물을 먹이다가 잠이들어 꿈속에 옥황상제와 거북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당장 대폭우를 내리라고 거북이에게 말하였다 한다.
    거북이는 말을 듣고 물속으로 가려는 순간 백중이는 잠을 깨여, 아니다 거북이에게 옥황상제가 한말은 잘못한 말이다 하여 번복시켜 말하기를 대폭우를 불게하면 백성이 큰일난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다음날 바람이 불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백중의 덕택으로 백성이 살게 되었다 하여 이날을 백중날로 정하여 매년 백중제사를 재내면서 백성들의 농사와 목축에 이상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백중이 은혜를 감사히 여겨 해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그의 혼을 달래준다 하였다. 백중은 옥황상제의 말에 거역하였다하여 벌을 주려고 하니 스스로 바다에 투신하여 죽었다 한다. 그래서 백중일로 정하였다 한다.

    보제와 부락민

    보제(輔祭)라 하면, 거리적인 행사로서 확실한 유래 및 시작 연도에 대하여서는 기록적 문헌이 없어 부지(不知)하나 추측컨대 약 6백년의 설촌때부터 부락민의 복리증진 및 제악역(諸惡疫)과 악마악귀를 추방하여 리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1방, 오곡풍제와 풍어축산우마번식을 잘 되게 기원하는 종합적인 대제가 보제이다.
    그러므로 보제時가 되면 리민 각자의 정성은 물론이며 제관을 선택하는데 당년생 기복덕으로 해당하는 자 중 3명을 즉 초헌종헌 양집사 대축날자 순으로 선출받은 제관들은 최선의 정성을 다해야 되기 때문에 행제일자가 결정되면 7일간을 동내에서도 광활한 옥간과 청결한 제여건이 구비된 중류이상의 가옥을 선정하여 제관전원이 극진정성함은 철칙적(鐵則的) 의무이다.
    그러므로 동민전체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제기(祭期)중에는 정성을 경주(傾注)하는 것이 실례(實例)이다. 또한 입제가옥의 전후통로 백여m지점에 금줄을 쳐서 불정한 사람의 통행금지를 예고하는 조치를 취한다. 차시(此時)에는 일사불난하는 정성으로 리민전체의 단결력을 과시하는 것이 자고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오는 전부락민의 공통된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행제(行祭)
    행제는 입춘전후 10일방 간에 행제일을 정하나 혹정혹(或丁或) 해일자를 택하여 거행한다. 모든 제물을 조제한 제관들은 현장까지 운반하고 하오 10시경에 지하여 설상하였다가 행제는 기익일상오(其翌日上午) 2시까지 완료하게 된다. 물론 행제는 대축호창(大祝呼唱)하는 문예에 따라 아주 엄숙하게 진행된다. 예전에는 동서합동으로 거행하였다가 근세에 와서 동서 각 별단(別檀)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동김녕 제단은 성(城)색게 방면의 공한지에서 정결행제하고 있고 서김녕리에서 지금도 계속하는 속칭 「오르곰빌내」 중앙에 삭석적담과 내부에 상하대소석상이 조각되어 있다. 결론
    지금 전국에서는 주민문화를 찾자는 운동이 팽배하게 전개되고 있는 풍조에 보조를 같이하는 의미에서 보제를 가장엄선하고 경건한 유서 깊은 석자에 우리조상들의 가진 정성을 다마쳐 지상최고의 대보제를 모시며 음복하였다는 전통을 살려 앞으로는 리민들의 단결조합의 결집체로 살아 매년 대제를 거행하고 리민 대회로 겸하여 건설적 중지를 모아 뜻깊은 행사로 승화시키는 계기로 삼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사신

    제주도에는 신당을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별하고 그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각 부락마다 다르다. 우리 김녕리에는 뒷할망이라 하여 사신을 「칠성본우리」의 계보화되어 있고 이 사신의 등전(登典)과 주처(住處)는 집뒷뜰에 자그만치 덤불 모양으로 만들어 두고 그속에는 사발에 쌀을 가득히 담아두고 거기에 뒷할망 사신의 정령이 머물고 있다 하여 좀처럼 건드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뒷할망 뱀을 모신 가정에는 항상 그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어느 곳에 가서 살아도 꼭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어떤 가정에는 안고팡에 모셔 놓기도 하고 오색천을 걸쳐 놓는데도 있다. 이와같이 우리 제주에는 신위를 모시는 데가 만다.

    신구간설

    특히 우리 제주도에 풍속으로 가옥수리와 이사는 꼭 신구간에 무슨일을 해도 아무탈이 없다 한다. 그래서 신구간의 기일은 대한(大寒)을 지난 5日부터 입춘(立春)전 열흘 동안을 신구간이라 하여 이 기간에는 백수제신이 천상(天上)하는 기간이다. 지상귀신이 부재중인 기간이라 그래서 인간은 이틈을 타서 집안의 모든 일 가옥, 울타리, 부엌, 변소, 외양간 등을 택일없이 해치우게 된다. 그래서 이사하는 일이나 수리하는 일은 꼭 신구간을 택하는 것이 우리 제주도에 오랜 풍속으로 내려오고 있다. 부모, 조산의 이묘(移墓)도 이때에 하면 탈이 없다.

    신당설과 풀이말

    제주도에는 신도 많다. 한 집안에서만도 열 두 종류의 신이 있다.
    1) 성주 : 집 지킴이(신).
    2) 문전 : 상방이 대문 지킴이.
    3) 조왕 : 부엌의 지킴이.
    4) 안칠성 : 고팡의 쌀독 지키는 당신.
    5) 밧칠성 : 집 뒤에 있어 집의 재산을 지켜주는 지킴이.
    6) 칙부로인 : 측간의 지킴이.
    7) 주목지신 : 정주목의 지킴이.
    8) 정살지신 : 정낭(정살)의 지킴이.
    9) 눌굽지신 : 눌굽(노적가리)의 지킴이.
    10) 울담·내담지신 : 울타리, 돌담의 지킴이.
    11) 오방토신 : 집터 사빙을 지켜주는 지킴이.
    12) 토지신 : 남자들이 제사하는 집터의 지킴이.
    이들 지킴이(神)들이 형성되는데 대하여 신화가 있다. 이 신화는 "문전본풀이"라 하여 집안에서 하는 모든 굿에서 읊어진다.
    ● 명당푸리
    명당이라 명당이라 / 이 터전 명당이라 / 아들 낳면 효자 낳고
    딸 낳으면 열녀 낳고 / 소 키우면 황소되고 / 말 키우면 용마되고
    닭 키우면 봉황되어 / 명당터를 길복하네 / 내명당수 흘러갈 듯
    부귀재록 그득하니 / 이 터전이 명당이라 / 명당이라 명당이라.
    ● 집터푸리말
    작은사랑 앞쪽으로 큰사랑 다시 지어 / 들며날는 손님들을 예의있게 대접하네
    큰방옆에 서고지어 수천권 책을 두고 / 성인군자 본을 받아 수신하고 제가하네.
    네칸대청 크게짓고 찾아오는 제다들과 / 고담하고 청론하며 도약하고 함양하네
    작은방을 마련해서 찾아온손 숙식하고 / 방옆으로 다락지어 난간돌려 문을열고
    밝은달 흐르는 구름 시를 지어 문답하네. / 큰 사랑채 남쪽으로 중문내고 행랑짓고
    중행라채 바깥으로 반듯하게 마당하고 / 마당밖에 행랑지어 솟을대문 날개삼네
    솟을대문 큰문짝을 넓게열고 나서보면 / 서류동입 명당수에 돌다리 걸려있고
    돌다리밑 흘러내려 연못에 모여드네 / 신명들의 도움으로 정성들여 지어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번 듯이 들어섰네. / 보은박속 명인들이 흥부네집 지어놓듯
    법도맞춰 형국속에 알맞도록 지었으니 / 마을사람 칭찬이요 인근사람 구경일세
    당호편액 높이달고 가둥마다 주련하고 / 동구밖에 정자지어 물물이 갖추어두니
    도편수의 규모솜씨 이제사 끝이났네.

    신작로공사

    서기 1914년경에 일본인들이 자치경호를 위하여 구도로가 섬소(陝少)하다는 이유로 일주도로를 전체 4m 넓이로 확장하여 인도 차도로 변용하였다.
    그로 인하여 도로가에 농토를 소유한 농민들은 피해가 많았다.
    우리 김녕리도 신작로에는 차도로 사용하고 구시장변이 간선도로로서 주민이 왕래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화된 도로로서 8m로 확장하여 여하한 대형차라도 통행할 수 있으며 도민 생활에 대단히 편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차 이차, 삼차의 도로를 재확장 공사할 것으로 계획되고 있어 제주도는 관광지 개발을 위하여 산중부락까지 도로확장하면서 교통이 편리하도록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화 아스팔트 도로가 개통되자 차 주행에도 안심할 수 있다. 장차 교통이 편리하면 생활환경이 평안하여 질 것으로 본다.

    연등물과 연등제의 유래

    음력의 새해를 맞이하면서 정월 초하루 날에 정월 명절제를 조상님께 명복을 비는 정성에서 올리게 된다. 15일이면 자신들의 건강과 가족의 질병예방을 위하여 오곡밥을 지녀 수족의 손 발톱을 끓여서 사가가(四街街)에 방부(放附)하고 일년을 무사하도록 기원한다.
    이월이 되면 1일부터 15일까지 연등할머니가 온다 하여 각 농어촌에서는 가정을 청결하게 하고 또는 집 수리나 외지출타를 중지하였다. 속칭 음력 2월을 영등달이라고 부르고, 영등달은 영등신(영등할망)이 2월초에 우도(연평)리에 상륙하여 수림리(輸林里)까지 갈 동안 기간에 있는 부락에는 집집마다 나무장대를 세우고 색채 비단을 달아서 신을 말자 제신을 즐겁게 하고 밤에는 연등불을 켜므로 이 제를 연등굿(燃燈祭)이라고 하여 초하루에 시작하여 보름에 끝난다고 전하여 왔다고 고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행사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대략은 동일하여 세화 김녕 조천 역내 한림 등으로 연등제를 크게 제를 올린다.
    당시 우리 김녕리에서는 서김녕리 영등사장에서 대대적으로 행사를 하였으며 지금도 그 장소에는 돌담으로 이여진 곳이었고 돌하르방이 서 있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가끔 제사를 지내러 가는 사람도 있다. 설에 의하면 영등 할망이 옷을 입고 오고 우장을 쓰고 비가 오면 풍년이 들고 역은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들어 영등들에 배를 타고 작업을 나가면 바다에 흉년이 생긴다 한다. 영등할망은 농작물은 물론 바다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면의 학설은 정월 15일이 경칩이요, 이월 초일부터 춘분이요 15일후면 청명이다.
    이 기간은 천지만물이 조화지성기(造化之性期)로 정숙하며 만물의 시동을 축복하여 주는 성스러운 마음의 자세를 지켜나가는 것을 우리 안간은 신적인 존재로 만사에 행운을 비는 연등제이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정숙하게 신을 모시며 자연조화지신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 이월의 영등할망은 육지에도 지방적으로 이에 풍속이 내려와서 인사정동이나 건물수리는 삼가고 있다. 그래서 이월은 새해를 맞이하는 달로서 우리 인간에게 축복을 올리는 달이라 하겠다.
    지금은 시대에 따라 지방적으로 제를 지내는 풍속이 없어지면서 이에 속하는 무형 문화재로 서기 1980년도에 국가에서 중요 무형문화재 제 71호로 지정한 칠머리 당굿으로 하여 옛 풍속의 명맥을 이어 가게 되었으니 이나마 다행한 일이다. 현재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칠머리당의 당위치는 산시랑과 사라봉등래 중간의 위치에 있어 음력 2월에 무속재라고 하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 당의 매인 주 심방은 안사인(安仕仁)씨라고 하여 매년 2월 14일이면 제주 건입동에서 해녀들과 선주들이 모여서 연등송별 대제를 올리고 있다 한다. 심방 안 사인씨는 1928년 생으로 인간 문화재이며 그 전수생들이 무속 예술에 오로지 일생을 걸고 있다 한다. 우리는 향토문화의 전래에 무관심 했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내고장 향토문화의 발굴 보존에 모두 참여함은 물론 연구 노력하였으면 한다.

    차귀문화권

    차귀문화권(遮歸文化圈)이란 사귀(蛇歸)를 신앙하는 산인사회의 문화권을 뜻한다. 김녕뱀굴의 전설에 나타나는 요망큰뱀은 김녕뱀굴의 당주이다. 토산방전설도 이와 흡사하여 사귀를 당주로 모시고 있다. 이 사귀는 딸을 잘 따라간다고 하는데 이는 도채비(도깨비) 귀신이 딸을 잘 따라 다니는 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김녕부락 남쪽에 돈굴(돼지굴)이 있는데 여기서 춘추로 큰 돼지를 희생하여 제액수복(액을 막고 복을 빈다)의 제를 지낸다. 새 음식이 생겨도 굴에 가서 제 지낸다. 이것이 소위 돗제의 시초라 하는데 표선면 토산리와 김녕리에서는 수시로 집에서 무당을 청해다가 액을 막고 복을 빈다.
    이것이 원래는 몽고족들이 김녕에 살면서 제 지내던 유풍이라고 한다.